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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인터뷰

[KJY 만난 사람들] 국제사회에 단색화를 알리다, 윤진섭 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by 콜라보클로버 202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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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뀔 때마다 문화 정책이 바뀌게 되면 비전 있는 문화 정책을 세울 수가 없다. 뭐든 기획하면 단기로 하게 되고 중장기 프로젝트를 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런 부분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윤진섭 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윤진섭 작가의 말이다. 그는 한국의 단색화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빙 큐레이터로 한국의 단색화전을 기획하며 단색화의 명칭을 'Dansaekhwa'로 표기해 공식화한 점이 크게 주목받았다.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 대학원 미학과에서 문학석사, 호주 웨스턴 시드니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등을 맡으며 미술 평론계에서 입지를 구축했다. 지난 2000년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 2012년 한국의 단색화전, 2018년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2부, 한국 행위미술 50년을 비롯한 수많은 전시를 기획했으며, 그 자신이 퍼포먼스 작가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미술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윤진섭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위 예술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전위그룹하면 한국미술사에서 유명한 ST(Space and Time) 그룹이란 게 있다. 한국의 대표 전위 작가로 이건용 선생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1974년에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해서 <신체항>이라는 설치 미술 작품을 전시했는데 인기를 끌었다.


이 분이 지난 1969년도부터 ‘S.T 미술학회’라는 걸 만들어서 그룹 활동을 했는데, 나는 1977년 당시 대학교 3학년생으로 경력도 일천했을 때 이 그룹의 회원으로 초대를 받았다.


70년대 한국 최초로 이벤트를 했던 인물들이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 트리오였다. ‘해프닝’은 우발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는 거지만, ‘이벤트’는 개념적인 경향이 강했다. 70년대 미국에서 개념미술이 들어왔는데 상업미술이 뭐든 돈으로 환산되곤 하니까 그에 반발한 예술가들이 팔 수 없는 작품을 만들자 해서 개념미술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런 게 팔린다.


마르셀 뒤샹은 말하자면 현대미술의 아버지다. 개념미술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다. 변기 하나로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 2016년은 다다운동 탄생 100주년, 2017년이 뒤샹의 변기(샘) 탄생 100주년이었다. 2018년은 뒤샹의 서거 50주년이다. 미술평론가로서 이런 것에 관심을 갖고 현재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분석하는 글을 쓴다. 어쨌든 그래서 전위적 관점에서 선배들과 '이벤트'를 하게 된 거다.

윤진섭, 종이와 물, 서울화랑, 1077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늦은 나이에 홍대 미학과를 졸업했는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문예활동을 많이 했다. 법대 나온 사촌 형이 있는데 그 형의 시골집 작은 방은 장서로 가득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그 방에서 책을 많이 읽었다. 교내 백일장에서 여러 번 입상하기도 했다. 지금 예명을 쓰고 행위예술과 오브제, 설치미술도 하는데, 왜 예명을 쓰는가 하면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퍼포먼스, 전시기획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울타리 안에서 예명을 쓰고 서로 다른 활동들을 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된다. 그렇게 예명으로 페이스북에 글도 올린다. 퍼포먼스는 2009년 이후로 60회 정도 예명을 써서 했는데 할 때마다 예명이 바뀐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호가 330개가 넘는다. 김정희 선생에 정통한 연구자 최준호 박사가 김정희 선생의 명호(예명)을 최대한 찾은 결과가 334개다. 동양의 문예적 전통에 바탕을 둔 추사 선생의 명호 사용을 전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됐다. 나의 많은 예명 사용은 서양에서는 드문 자아 정체성에 대한 탐색과 관련이 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이름은 오로지 하나다. 예외가 있다면 마르셀 뒤샹인데, 그는 에로즈 셀라비(Rrose Selavy)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현재 나는 약 50여 개의 예명을 쓰고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와 예술의 상업화 현상에 저항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름이 브랜드화돼서 작품 가격이 오르는 것에 저항하자는 것이다.


그런 예술적 관심과 감각은 타고난 것인가


초등학교 때 학교도 안가고 동네 형들과 뒷동산에서 놀곤 했다. 제도가 싫었다. 형수가 시집을 오면서 한국단편문학전집 중 한 권을 가져왔는데 이상 김해경의 작품들이 수록된 책이었다.


중3 때 접했는데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내용은 이해 안 되더라도 감수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대학에 가서도 선배들과 전위적인 단체에 몸담은 것도 그런 독서체험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단색화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우선 한국의 단색화와 관련시켜 볼 때, 70년대부터 여러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해왔는데, 나는 당시부터 모노크롬이라 불리던 단색화를 직접 봐왔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게 단색화인데 이게 왜 안 알려졌을까 의문이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2000년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에서 큐레이터를 했다.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 전시였는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과 한국에서 붐을 이뤘던 전위적인 미술 경향으로 한국의 ‘단색화’, 일본의 ‘모노파(Monoha)’라는 것이 있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는 전시회를 하면서 서양에서 부르는 대로 모노크롬이라고 표기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했다. 도록의 교정을 보면서 영문으로 ‘코리안 모노크롬 페인팅’이라 돼 있는 것을 모두 ‘단색화(Dansaekhwa)’로 바꿨다. 외국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영문판에 이 표기가 처음 나갔다. 그렇게 일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그 이후로 2012년까지 12년 동안 단색화에 관한 작가론 쓰고, 논문 쓰고 강연도 꾸준히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기회가 왔다. 201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빙 큐레이터의 자격으로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단색화라는 명칭으로 전시를 해서 관객 5만 명이 들어 대히트를 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가 기관이다 보니 외국 미술관에 도록을 보내고 보도자료를 다 뿌린다. 외국 사람들에게는 단색화라는 발음이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이 능숙하게 발음하게 됐고, 외국에서도 많은 전시가 열리는 등 지금은 세계화가 많이 됐다.




보람된 순간


70년대부터 행위예술을 했는데 내가 큐레이팅을 하고 평론도 하고 하니까 이걸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지난 2017년이 한국 행위미술이 50주년이었다. 40주년 기념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미 했고 50주년은 어디서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아카이브전을 작게라도 하자 해서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KIAF 2017]에서 아카이브 중심의 전시를 했다.


2018년에는 대구미술관에서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이라는 전시회를 통해 현재 수원시립미술관장으로 있는 김찬동 선생이 1960-80년대의 한국 전위미술을, 그리고 내가 ‘한국 행위미술 50주년’을 맡아 아카이브 중심으로 보여줬다.
협력 큐레이터로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한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


퀘벡에 있는 ‘르 뤼유(Le Lieu)’라 하는 문화공간을 다녀왔다. 리차드 마르텔이라는 퍼포먼스 전문의 디렉터가 그곳에서 40년 동안 근속하면서 1958년부터 1998년까지의 세계 퍼포먼스의 역사를 다 정리했다. 자료집을 보니 피에르 레스타니, 장 자끄 레베끄, 로베르 피리유 등 쟁쟁한 평론가들의 글과 자료가 망라되어 있었다. 행사를 통해 국제적 전문가들과 함께 세미나도 하고 퍼포먼스 작품도 발표하게 된 점도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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